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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

재와 사랑의 미래 / 김연덕 본문

재와 사랑의 미래 / 김연덕

홍제 2023. 2. 1. 13:53

  "잘 살자,

  이제 잘 살자."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따뜻한 실내에서

  담요를 덮고

  벙거지 모양 기구를 쓰고

  복잡하게 고안된 금속 컴퍼스를 쥐고서

  눈을 감았다.

  원을 그렸다.

 

  무엇이 보이나요? 드넓게 펼쳐진 눈밭 위에서 아득하게 들려오는 심령술사의 목소리.

 

  누구도 밟지 않은

  어떤 소리라도 금방 사라지는 눈밭 위에서

  벌거벗은 채

 

  수영하는 한 남자가 있고

 

  남자는 추워하거나

  손 흔들거나 웃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를 외면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허공에서 허우적대는 그의 두 팔이 햇빛에 검게 예쁘게 그을린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무섭도록 내 마음을 끌고

  걸음을 끌었다.

 

  그 누구도 밟지 않던 눈밭에

  한 걸음

  두 걸음 내딛는 동안

  날카로운 컴퍼스의 끝은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

 

  우리는 원으로 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손에 힘을 주고 멈추지 마세요. 집중해서 계속 움직이세요. 심령술사가 지시하고 묻는다. 무엇이 보이나요?

  나는 대답한다. 안 보여요 아무것도. 컴컴해서 아무것도 안 보여요.

 

  머리 위의 하늘과 빛

  온몸을 뒤덮은 공기는 비현실적으로 청명하고

 

  기구에 달린 전구들이 요란하게 번쩍이고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왔어요? 남자의 중얼거림과

  거짓말 말고 말해요, 심령술사의 다그침

  춥지 않아요? 나의 외침이

  직사광선 아래 어지러이 놓일 때

 

  이곳으로 걸어오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이곳에서 내내 얼어 갈

  영원히 남아 있을 손을 뻗어 나는

  그것을 어루만졌다.

 

  그 순간 기구의 고리와 이음새가 내 머리를 세게 조이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거대한 입김이 내 얼굴과 남자의 얼굴까지 완전히 덮는 것을 바라보다 최면에서 깼다.

 

 

                               🟆

 

 

  무언가 먹거나 읽을 수 있던 건 눈이 그친 후였다.

 

  심령술사는 기구와 컴퍼스를 들고 혼자 돌아갔다고 했다.

  창밖으로 심령술사의 스키 자국이 길게 난 것이 보이고

 

  그 위로 겨울 해가 어둡게 내려앉고

 

  길목에 붙은 모든 집들이 부서진 장난감처럼 얌전하다. 벽난로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스쳐 간 얼굴들을 잊으려 서로의 볼과 볼을 맞댄다.

 

  그런데 왜 거짓말했니? 안 보인다고 아무것도 없다고 왜 그렇게 우겼어?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기구는 못 쓰게 돼.

  담요를 고쳐 올려 주며 그들이 묻고

 

  사람과 겨우 비슷해진 얼굴로 나는 답한다.

  "간직하고 싶었어요."

 

  한 바퀴 다 돌 때까지

  바늘도 걸음도

  센서도 멈출 수 없는 것

  온 힘으로 기다려야 하는 것이어서

 

  컴퍼스는 늘 중심을 가만히 찌른다.

  조용하게

  벗어나지 못하게 원을 그리며.

 

  "간직하고 싶었어요."

 

  내일 내릴 눈으로 스키 자국이 덮이는 동안

 

  유리, 종이

  손바닥에 겹쳐 번지는 자국

 

  눈밭이 몇 번 사라졌는지는 기억에 없다.

 

 

                                 🟆                                                 

 

 

  한여름이었다.

 

  나는 수영을 못했고 그는 수영을 잘했다. 육지에서 자란 우리에게 수영은 낯설고 신기한 운동이었지만 무리해서 배우지는 않아도 되었다. 어떻게 뜰 수 있는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육지를 잊을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그 사실에 깃든 매혹을 알고 있었고 그는 그것을 보여 주었다. 그것만 보여 주었다.

 

  작은 점으로 시작된 여름이 피구공만큼 커지고, 공중을 떠다니고, 점점 더 커지다가 제 스스로 터질 때까지. 빛에 찢겨 갈기갈기 사라질 때까지.

 

  그래서 나는 수영장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수영장에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생각했다. 많이 하진 못했다. 대신 수영장 모서리에 자주 앉았다. 거기 걸터앉아 가만히 지켜보았다. 물살을 가르는 그의 두 팔이 수면 위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모습을, 햇빛에 예쁘게 그을려 가는 모습을.

 

  떠다니던 여름이 내 머리를 지나며 무릎 아래 거대한 그림자를 만든다. 크기와

  시간을 조금 초과해서 머문다.

  모서리를 따라 걷던 개미가 그 안에 갇힌다.

 

  원 안에서

  팔다리가 타들어 가는 소리

 

  은빛 다이빙대가 핑그르르 떨린다. 뛰어든 것이 나였는지 다른 사람이었는지, 모르는 사이에 내 뒤로 다가온 그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                                                 

 

 

  컴퍼스나 기구 없이 먼 미래로 돌아갈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                                                 

 

 

  양극단의 시공간만이 서로를 잇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눈보라

  태양

  물방울

  죽은 매미들

 

  지표면의 중심에서 빚어지는 마음들

 

  엇갈린 채 얼거나 녹아도

  잊히지 않는 눈빛이

  동작이 있고

 

  직사광선 아래 그것들은 섞이고 모인다.

 

  다시 눈보라

  어깨

  타일과

  뜨거운

 

  눈밭의 얼굴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왔어요? 날 보고 있어요?

 

  오래전 여기 남겨 두고 떠난

  작은 나의 손,

  나만 아는 심령술사가 묻는다.

 

  무엇이 보이나요?

 

  무엇을 말하고 싶나요?

 

  무엇을 말하고 싶지 않나요?

 

 

                                 🟆                                                 

 

 

  누구도 뛰어들지 않은

  어떤 소리라도 금방 사라지는 수영장에 눈이 내린다. 내릴 것이다.

 

  "잘 살자,"

 

  물살을 가르며 땀을 흘리며 태양 아래 누군가 빛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손 흔들거나

  흔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느새 방 안에서

  고리를 조여 주며

  무언가 도와주려는 사람이 되어

 

  "이제 잘 살자."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수영모를 쓰고

  복잡하게 고안된 컴퍼스를 쥔

  미래로 가는 사람 곁에

 

  모르는 사랑 곁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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