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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

같이 과자 먹었지 / 황병승 본문

같이 과자 먹었지 / 황병승

홍제 2023. 3. 22. 13:58

  엄마를 닮은 까마귀들......

  호박색 자동차와 달콤한 과자...... 무지개...... 밤거리......

  이것은 아름다움과 슬픔의 끝에서 만난 세계

  우리는 모두 다섯이었고

  까마귀가 되어서 행복한 까마귀들은

  가끔씩 내게 말을 건넸지만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같이 과자 먹을래?

  같이 과자 먹을래?

  나는 그렇게 알아들었고 수긍했고 고개를 끄덕였지

  자동차의 배기통에선 무지갯빛 연기가

  피어올랐어 물감처럼

  뿜어져 나왔지 우리는 아무도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그것을 다 알고 있었고 또한 우리는

  심한 다툼 끝에 화해를 한 자매들처럼 더욱 깊고 친밀해져서

  가득한 사랑의 기운으로 가슴이 저려왔다 손을 맞잡고 있었고

  나는 까마귀들의 여동생처럼, 웃었지

  까마귀들은 착하고 다정한 언니들처럼

  내 앞날을 걱정해주었고 격려해주었어 사랑하는,

  언니들...... 꿈같은 시간 볼을 타고 찔끔, 눈물이 흘렀어 이런 게

  무지개 향이라는 것이구나 이런 게 자동차에 함께 올라탄

  우애 좋은 자매들의 이야기로구나 더 바랄 것이 없는

  흙빛의 거리 이것이 우리가 그렇게 갈망하던 가정이고

  따뜻한 음식이고 애정의 시간, 미래로구나

  나는 눈을 뜨는 게 싫었고 두려웠다 이것은 아름다움과 슬픔의 끝에서 만난 세계

  나는 네 명의 언니들과 함께 과자 먹으며 계속해서 귓전을 맴도는 달콤한 소리

  우린 오늘 같이 과자 먹었네

  우린 오늘 같이 과자 먹었어

  속삭이며 달아나는 자동차

  언니들, 눈을 달고 태어났다는 사실이 나는 원망스러웠고

  늘어진 어깨, 팔과 몸통이란 게 썩어 문드러질 이 두 손과 다리라는 게

  싫었고 두려웠다 같이 과자 나누어 먹는, 아름다움과 슬픔의 끝에

  또 하나의 추하고 냄새 나는 살과 피와 똥과 정액의 세계가 싫어서

  같이 과자 먹으며

  같이 과자 씹어 먹으며

  더 이상 나는 까마귀들을 언니라고 부를 수가 없어서

  나는 그만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렸고

  질 질 질 무르팍에선 피가 흘렀다, 가버려요

  언니들...... 정말로 가버리는 언니들, 이런 게

  맹세의 반지가 빠져 달아나는 소리다

  이런 게, 더 이상 되돌릴 수 없이 금이 가버린 가정의 냄새고

  더 이상 노골적일 수 없는 핏빛의 거리 이것이 우리가 그렇게 증오하던 전쟁이며

  식어빠진 음식이고 미움의 시간, 현재로구나

  나는 더 이상 눈을 감는 게 싫었고 두려웠다

  까마귀들을 채운 자동차는 저 멀리로 고

  무지개는 걷히고 같이 나누어 먹을 과자 같은 건 어디에도 없는 세계

  매정한 언니들

  부스러진 과자

  호박색 지붕 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순간,

  코끝을 스치는 까마귀들의 겨드랑이 냄새처럼

  같이 과자 먹었지

  같이 과자 먹었어

  달아나는 목소리

  무지개, 밤거리, 다시없을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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