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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지퍼 이즈 브로큰 / 유계영 본문
새벽은 어제의 팬티를 뒤집어 입었지 성큼
냄새가 앞서나갔지
어제가 듬뿍 묻어 있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새벽에게 주어진 옷가지가 단 한 벌뿐이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나는 더이상 나를 낭비하지 않을 텐데
내일은 오늘을 뒤집어 입은 채 앞장선다
당당하다, 그러나 조금 쑥스러운 기색
주인이 벗어둔 바지 속에서
가장 고약한 냄새를 빼물고 거실을 활보하는
명랑한 치와와처럼
발톱만으로
소리만으로
나의 대답들 중 몇 가지는 환청에 대꾸한 것이겠지
목소리의 안감에 입술을 대고
개미를 꼭꼭 밟아 죽인 발끝에게는 아무 말 못했지
천장에 머리가 닿을 때까지 까무러치는 이마
이불 끝에 삐져나온 발가락
새어나오는 것들은 가느다랄수록 간절하고 아름다워
죽은 가수의 라이브앨범에 녹음된 휘파람과
주전자의 이빨 사이로 피어오르는 수증기처럼
이불을 뒤집어쓴 사람의 입속에서
중얼거림이 불어터지고 있네
새벽 창문의 기도
아침의 빛깔은
누구의 고장난 지퍼에서 새어나오는 것일까
안팎의 무늬 동일한 팬티를 매일 성실하게 뒤집어 입고 골목을 서성이는 새벽의 습관은
실금처럼 가느다란 골목 끝에 쓰러진 사람을 두고
매번 딴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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