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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

식후에 이별하다 / 심보선 본문

식후에 이별하다 / 심보선

홍제 2023. 4. 6. 15:09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거리는 식당 메뉴가 펼쳐졌다 접히듯 간결하게 낮밤을 바꾼다

  나는 저기 번져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 테니

  그대는 남아 있는 환함 쪽으로 등 돌리고

  열까지 세라

  열까지 세고 뒤돌아보면

  나를 집어 삼킨 어둠의 잇몸

  그대 유순한 광대뼈에 물컹 만져지리라

 

  착한 그대여

  내가 그대 심장을 정확히 겨누어 쏜 총알을

  잘 익은 밥알로 잘도 받아먹는 그대여

  선한 천성(天性)의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내가 죽 한 그릇 뚝딱 비울 때까지 나를 바라보며

  그대가 속으로 천천히 열까지 세는 소리

  안 들려도 잘 들리는 소리

  기어이 들리고야 마는 소리

  단단한 이마를 뚫고 맘속의 독한 죽을 휘젓는 소리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다 만 흰죽이 밥이 되고 밥은 도로 쌀이 되어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기근같은 것이다

  우리의 오랜 기담(奇談)은 이제 여기서 끝이 난다

 

  착한 그대여

  착한 그대여

  아직도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열을 셀 때까지 기어이 환한가

  천 만 억을 세어도 나의 폐허는 빛나지 않는데

  그 질퍽한 어둠의 죽을 게워낼 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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