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제
독 / 김선오 본문
방은 흑백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모두 직접 찍은 사진이냐고 물었을 때
너는 그중 한 장을 가리켰고, 나는 그것이 지난여름 내가 찍은 너의 발임을 알 수 있었다
너는 발목이 바깥으로 조금 휘어 있고
발가락 관절에 힘을 주고 땅을 움켜쥐듯 서곤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네 방에 가려면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마을버스를 한 번 더 타야 했고 내려서도 높은 계단을 끝없이 올라야 했다
어째서 이 동네는 늘 어두운 것일까, 어째서 흐린 하늘을 향해 걷다보면 흑백으로 된 방에 도착하는 것일까, 어째서 이 길에는 벽화 하나 없을까
어째서 너는 욕실 안에 암실을 마련해놓고 나를 오라고 부르는 것일까
내가 늘 어리둥절한 채 도착했으므로
너는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
어제 꿈에 너의 사진들이 나왔다고, 흑백 필름으로 찍은 바닷속을 보았다고, 걷잡을 수 없이 사진 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갔고 정신을 차려보니 흑백으로 된 수족관을 걷고 있었다고, 검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수조에서...... 천천히 눈을 굴리는 열대어들, 다양한 농도로 빛나는 지느러미들을 보았다고, 헤엄이 느리고, 느린 헤엄에 뒤따르는 물살 역시 흑백이었다고, 검은 기포가 톡톡 터지고, 나는 검은 복도를 산책하고 검은 관람객들을 지나치면서 걷다가 문득 내려다 본 나의 발이 하얗게 빛나고 있어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고
그런 말들을 허둥지둥 늘어놓았다
손에 쥔 유리컵 표면에 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너는 조용히 문틈을 청테이프로 막고, 마스크를 쓰고, 넘치지 않을 만큼 욕조에 현상액을 담는다
나는 너의 손끝에서 백지에 사람들이 불러와지는 장면, 풍경이 물에 빠지는 장면, 어둠 속에서 서서히 색이 드러나는 장면 같은 것이 극적으로 등장하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높게 쌓인 인화지 앞에 우린 서 있다
있잖아
며칠 전에 잠깐 카메라 뚜껑이 열렸어
필름에 빛이 들어가서 사진이 모두 날아가버렸나 봐
너는 장갑을 벗고 욕실 문을 연다
방은 액자에 갇힌 빛처럼 보인다
바로 닫았는데도 그러네, 말하며
창가의 재떨이에서 가끔 한 점의 재가 흩날린다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원향방감각 / 김종연 (0) | 2023.04.23 |
---|---|
프렌치 스쿨 / 김종연 (2) | 2023.04.23 |
야간비행 / 김선오 (0) | 2023.04.23 |
만년청춘 / 김이듬 (0) | 2023.04.21 |
새벽의 창은 얇은 얼음처럼 투명해서 2 / 장혜령 (0) | 2023.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