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제
도주로 / 심보선 본문
집을 나서는데, 아이 하나가 담벼락에 낙서를 하고 있다. 나는 옆에 선 채 가만히 지켜보기로 한다. "영철이랑 미영이는 사랑한대요. 씨발놈아, 미영인 내꺼다." 아이는 나를 보더니 주뼛거리다가 후다닥 달아난다. 너무 곧장 달음박질쳐서, 바로 앞에서 점점 작아지는 것 같다.
유심히 보면 담벼락 아래에는 잘게 부서진 백묵 가루가 수북하다. 아이는 정말 온 힘을 다 주어서 꾹꾹 눌러 쓴 것이다. 허리를 굽혀 손가락에 묻혀본다. 씨발놈아, 미영인 내꺼다...... 참 부드러운 증오다.
가방 속엔 빈 도시락 통이라도 들었는지 소리가 요란하다. 아이는 벌써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지만 아직도 들려온다. 수치심이란 저렇게 오래도록 덜그럭거리는 것일까. 발걸음을 옮기다 나는 문득 본다. 수많은 빛살들이 같은 쪽으로 도망치다가 컴컴한 그림자들로 길바닥에 와르르 넘어지고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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