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제
익선동 / 강혜빈 본문
수상하고 좋은 날이다
커다란 성벽 따라 걷는다
오늘 새로 태어난 가을처럼
허리를 곧게 펴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본다
한 사람의 주먹이 꼭 들어맞는다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홀연 사라지는 간판들
시절보다 먼저 물러나는 중인
어떤 구름들
개개비는 개개개 울고
매미는 맴맴맴 운다는데
나는 무어라고 울까
아날로그 기계가 되고 싶은
디지털 인간은 제법 쓸쓸해 보였다
오늘 같은 날에는 아무나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좋겠어
우연히 같은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자리에서 일어설지라도
수상하고 좋은 날이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의 뒷모습에서
느티나무 같은 그늘을 보았다
"그동안 당신이 죽을까 봐 걱정했어요"
한 그루의 나무에서
함께 늙어가는 나뭇잎들은 어쩐지
다정하고 무상하지만
이 좁은 골목 안에는
더 깊은 반성과 비밀과 기다림이 있어
오늘 참 쾌청하지요
공연히 날씨 이야기만 하게 되어도
저절로 믿어지는 사랑이 있다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사람과
다만 빈집으로 두는 사람
"아무도 되지 않아도 괜찮아요"
가을에 부는 바람의 이름은
소슬바람
나는 당신의 이름이
류 자로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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