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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

미래 일기 / 박상수 본문

미래 일기 / 박상수

홍제 2023. 2. 23. 16:18

  비단벌레 차를 같이 타고 싶었던 사람에게 선물을 건넸다 새로 나온 음반이야, 덧붙일 말이 많았지만 그 정도로만 말하기로 했던 결심을 잘 지킬 수 있어서 돌아오는 길이 자꾸만 늘어났다 대답도 없이 간략한 눈빛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걸으면 내가 나를 밀어내는 것처럼 얕은 멀미가 올라왔다

 

  빙글, 길게 휘어졌던 여름의 구름과, 걸어 들어가고 있구나 커튼 뒤의 하늘로, 여름의 복판으로,

 

  생도너츠와 홍차를 먹고 천변을 걸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잘못한 일들만 자꾸 생각났다 간판 없는 실비집에서 나를 야단쳤던 사람, 너에게는 결정적으로 빠진 게 있잖아, 그런 말을 듣는 일이 식물에 빛이 닿듯, 나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였다 커튼 뒤에 아무것도 없으면 어떻게 하지? 고장난 만화경의 무늬들처럼 지난날은 깨어져서 영원히 밀려갔다 밀려오고

 

  그칠 새가 없었던 참매미의 울음, 방학이 되어버린 서가를 서성이다 보면 책보다는 책등에 새겨진 제목들을 읽어 나가는 게 좋았다 이건 파랗고 이상해, 모든 게 싫어지고 미워지고 가라앉고 다시 더 가라앉고,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게 맞는 거고 모든 결속은 없는 거고, 너는 모든 것과 아무도를 좋아하는구나 귀에 닿는 소리가 무서워서 눈을 크게 뜨면 쌀벌레가 나방이 되고 말라 가기까지의 일생이 전부 보이는 것 같았다

 

  나에게도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건 주인공의 고통이래, 고난 속에서만 모든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부터는 무서운 일뿐일 텐데, 가름줄로 표시해 둔 문장들에 기대어 쪼그려 앉았다가 일어서면 빙글, 흔들리며 세상이 잠깐 나를 놓쳐서 멍이 든 것처럼 온몸이 아파 왔다

 

  그래도 된다면,

 

  미래의 나는 돌아오고 싶어 할지도 몰라, 방학이 끝나도록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이 여름으로, 밤에도 들을 수 없던 소리들이 한낮의 귓가에 무수히 들려오는 커튼 뒤의 그 여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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