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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못해 코칭에서 스노클링을 하다가 말미잘을 보고도 네 생각이 났어 / 육호수 본문
어젠 스노클링을 했어
위를 향해 벌린 대왕조개 입을
둥둥 뜬 채 한참 내려다보았지
무슨 말을 할 것 같아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스노클링을 하다 한국 사람을 만났어
그 사람은 어딜 보아도 히피였지
흠 없는 히피였고
아무튼
어제 만난 코리안 히피의 말에 따르면
마리화나는 치앙마이 것이 유명하대
이 말을 전해주려는 건 아니고
마음이 바닥났어
마음에 가라앉았던
주검들이 드러났더라고
그렇다고 주검들과 함께 누워
시체놀이를 한 건 아니고
론니비치에 나가
일광욕을 했지
마음이 바닥나서 이곳에 왔는데
통장 잔고도 바닥이 나 버렸어
어제 만난 코리안 히피의 말에 따르면
방비엥에선 아편도 판대
영어로 '오우피움'이라고 하면 알아듣는대
그렇다고 내가 방비엥에 가 보겠단 건 아니고
그게 꼭
통장 잔고 때문은 아니고
멍한 방에 누워 멍하니 있으면
고물 에어컨 소리가 파도 소리 같더라고
파도 소리에 맞춰 혼자 춤을 추는데
벽 속에서 누군가 킥킥 웃더라고
이제 내가 헛것도 듣는구나
약 같은 거 없이도 훌륭하구나 했는데
어제 만난 코리안 히피의 말에 따르면
찡쪽이라는 도마뱀이더라고
찡쪽이가 끽끽 웃은 거였구나 말했더니
끽끽 웃은 게 아니라 끽끽 운 거래
춤춘 거랑은 아무 상관없고 원래 그냥 운대
원래 그냥 우는 애가 어딨어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어서 울었겠지
그렇다고 이 말을 그 사람한테 했던 건 아니고
밤바다에 누워서 하늘 보면 북두칠성이
물음표로 보이더라고 바다 위 흔들리는
오징어 배가 더 별 같더라고 오징어 배를 보며 난
도망자가 아니라 목동 같고 이곳은
섬의 끄트머리가 아니라 초원의 한가운데 같고 메에에
흔들리는 별을 흔들리는 눈길로 쓸어보는 호수 같고
마른 우물을 내려다보는 목동의
까마득함도 알 것 같아서
옆에 누운 주검들도 다
마음 같더라고 마음이라서
주검이 된 것 같더라고
생각을 그치면 다시, 파도 소리 들려오고
들려오면
나는 주검들 사이에서 슬쩍 일어나
춤을 추지 춤추다
말을 잃고 집에 오지
잃은 말을 전하려 편지를 쓴다
그러면 너는
가능한 가장 먼 미래에서
시 읽는 사람
방비엥도 코칭도 모르지만
지구 이야기 읽는 사람
히피가 대마법사가 되든
찡쪽이 드래곤이 되든
마음에 잠긴 주검 같은 건 본 적도 없는
이 시를 읽는 마지막 인류
나는 입 벌린 대왕조개가 되어
물에 잠겨 사라질 말들을
편지 위에 풀어놓지
마음이 사라지기 직전의 인류에게
사랑하는 헛것에게
너를 떠올리며 나는 어려지고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끌고 가야만
닿을 수 있는 지옥이 있어
나는 어려지기만 해
기도도 욕망이라면
기도도 그만둘 거야
그나저나 어제 만난 코리안 히피도
가끔은 시를 쓸까?
시 쓴다고 하면 그 사람 그만 봐야지
스쿠터를 타고 섬의 동쪽으로 가서
해안선을 달리면
아카시아 꽃향기가 나
죽어 보려 속도를 올리면
아카시아 태풍도 맞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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