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맞는 운동장 / 황유원

홍제 2023. 3. 8. 15:00

  비 맞는 운동장을 본 적이 있는가

  단 한 방울의 비도 피할 수 없이

  그 넓은 운동장에서 빗줄기 하나 피할 데 없이

  누구도 달리지 않아 혼자 비 맞는 운동장

  어쩌면 운동장은 자발적으로 비 맞고 있다

  아주 비에 환장을 한 것처럼

  혼자서만 비를 다 맞으려는 저 사지의 펼쳐짐

  머리끝까지 난 화를 삭히기 위해서라면

  운동장 전체에 내리는 비로도 부족하다는 듯이

  벌서는 사람이 되어 비를 맞고

  벤치에 앉은 사람이 되어 비를 맞고

  아예 하늘 보고 드러누운 사람이 되어 비를 맞다가

  바닥을 향해 엎드려뻗쳐 한 사람이 되어 비를 맞아 버린다

  혼자 비 맞고 있는 운동장, 누가 그쪽으로

  우산을 든 채 걸어 들어가는 걸 본 적이 있다

  검은 우산을 들고 있어서 멀리서 보면 무슨 작은

  구멍 같아 보이는 사람이 벌써 몇 바퀴째

  혼자서 운동장을 돌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비 맞으며 뛰놀진 않는 운동장

  웅덩이 위로 빗방울만 뛰노는 운동장에서

  어쩌면 운동장 구석구석에 우산을 씌워 주기 위해

  어쩌면 그건 그냥 운동장의 가슴에 난 구멍이

  빗물에 이리저리 떠다니고 있는 건지도 몰랐지만

  공중을 달려온 비들이

  골인 지점을 통과한 주자들처럼 모두

  함께 운동장 위로 엎질러지는 동안

  고여서 잠시, 한 뭉테기로 휴식하는 동안

  우산은 분명

  운동하고 있었다

  혼자서 공 차고 노는 사람이

  혼자서 차고

  혼자서 받으러 가듯

  비바람에 고개 숙이며 간신히 거꾸로

  뒤집어지지 않는 운동이었다

  상하 전후 좌우로 쏟아지는 여름의 십자포화를 견디며

  마치 자기가 배수구라도 되겠다는 양

  그 구멍 속으로 이 시의 제목까지 다 빨려 들어가 버려

  종이 위엔 작은 구멍 하나만이 남아 있을 때까지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자신을 소멸시키겠다는 듯이

  가까스로 만들어 낸 비좁은 내부 속으로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소릴

  집중시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