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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성어 생김새 / 안태운 정말 좋아한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사랑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장난쳐야지 따라와봐라 좋아한다는 걸 자제해야지 비밀을 가지고 싶어서 비밀을? 그래야지 더워 추워 소리를 내야지 모르는 채 바라보면 순간 생겨나는 게 있고 자웅동체 의성어 생김새 의성어 생김새? 본떠야지 그것은 제비꽃 그것은 그네 소리내야지 정말 좋아한다면 해야지 해야지 해야지 하다가도 꾸물거리는 작은 것의 빛을 바라봐야지 꾸물거리는 무엇이 있으니 비켜서야지 말아야지 좋아한다면 두 개의 머리를 갖고 놀아야지 아침 목소리를 만들어야지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끝에 불과하고요 해야지 정말 좋아한다면 나가려는데 누구를 그리워한다면 해야지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8. 27.
  • 점등 구간 / 안희연 내 인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누군가 내 머리 위에 물 양동이를 올리며 말했지 자, 작은 새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배달해주렴  나는 어지러웠어 태어나자마자 걷고 있는 자신이 무슨 대단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물 양동이를 들고 있는 모습이  모두가 그런 양동이를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으므로 수긍했지 날개는 늑골 아래 감춰두고 새는 잘 접어두었어  너의 새는 어디에 있어? 물어올 때면 한참을 생각해야 했어 책장 사이에 넣어두었다고 대답할 때도 냉동실에 얼려두었다고 말할 때도 있었지  시간은 핀셋을 들고 흰머리를 제거하려는 집요한 손처럼 굴었어  나는 아직 내가 새인지 새의 탈을 쓴 인간인지 이 양동이는 무엇을 위한 질문인지 대답인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바닥을 나뒹구는 주인 없는 양..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8. 27.
  • 유독 / 황인찬 아카시아 가득한 저녁의 교정에서 너는 물었지 대체 이게 무슨 냄새냐고  그건 네 무덤 냄새다 누군가 말하자 모두가 웃었고 나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다른 애들을 따라 웃으며 냄새가 뭐지? 무덤 냄새란 대체 어떤 냄새일까? 생각을 해 봐도 알 수가 없었고  흰 꽃잎은 조명을 받아 어지러웠지 어두움과 어지러움 소에서 우리는 계속 웃었어  너는 정말 예쁘구나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예쁘다 함께 웃는 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는데  웃음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어 냄새라는 건 대체 무엇일까? 그게 무엇이기에 우린 이렇게 웃기만 할까?  꽃잎과 저녁이 뒤섞인,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서 너는 가장 먼저 냄새를 맡는 사람, 그게 아마  예쁘다는 뜻인가 보다 모두가 웃고 있었으니까, 나도 계속 웃었고 그것을 멈.. 공감수 1 댓글수 0 2024. 8. 2.
  • 사랑하는 사람 / 차호지 그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불길 속을 걸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말은 믿을 수가 없어.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늦가을 밑동만 남은 수수밭에 불을 지르고 그 위를 걸었다. 그는 그 때문에 그곳에 갇혔으나 내게 마음의 짐을 가지지 말라고 말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는 매일 내게 편지를 보냈고 나는 그 편지를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그에 관여했다. 그와 내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을 때 나는 울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그게 진짜 사랑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하자 그는 이미 증명을 마친 수학자의 얼굴로 나에게 편지를 건넸다. 그는 나의 울음이 멈출 때까지 내가 울면서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들었고 편지가 젖거나 구.. 공감수 1 댓글수 3 2024. 8. 1.
  • 그날의 빛 날씨 / 안태운 들어가나요, 그날의 빛 날씨 그 속으로 환대받는다는 느낌이 든다면 기분이 좋겠지 문득 고향집을 나오면서 어느새 일하다가 점심을 먹으러 나가면서 사물의 그림자와 그 주위의 빛으로 그날의 빛 날씨를 가늠해본다면 그렇게 어디서든 나와서 계속 다해갈 수 있다면 다한다는 마음이 되어본다면 좋을까 그날의 빛 날씨 오래 머무를 수도 있었지 좀더 즐거운 일을 해보자 좀더 이롭고 기쁨이 되는 일을 해보자 낙천적인 사람과 함께 걸어갈래 행동해볼래 그렇게 다짐하면서 오후에는 걷고 있을까 내가 만난 사람들의 즐거운 표정과 호방한 웃음을 어느새 깊어지는 머뭇거림과 고적함을 그 뒷모습을  기억하면서 그날의 빛 날씨를 낙천적인 사람으로 대할까 통일을 하고 사랑을 하고 동물을 하고 식물을 하며 입체를 그렇게 해본다는 마음으로 그날의..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8. 1.
  • 나들목 / 오병량 갈피라는 말, 소매를 걷는 여자의 손목에서 본다 들머리에 닿은 흔적에는 변심한 애인의 입술 자국 얼핏 보았다 한 사람을 두 번 사랑하려고 그은 중앙선이 붉다 그 어름에 바리케이드 물결 같다 물살을 떠미는 구릉 같은 비가 왔나요? 하필 오늘 같은 날 여우비다 마스카라가 번져 눈빛을 올린다 그녀, 와이퍼가 닿지 않은 창으로 더러운 햇살을 쬐고 있다 그러다 문득, 이 노래 나도 알아요! 신호를 놓쳤다 나를 알아요? 잘못 들어서 두고 온 우산 생각 관리사무소에서 전화가 왔어요 배관을 살펴본다고 수도세가 많이 나오는 전셋집, 주인은 전화를 받지 않고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모르겠다, 구멍난 우산을 누구에게 선물받았는지도 나는 여자가 바라보는 물가를 한없이 동요해본다 고장을 염려하는 집주인의 심정으로 배관공의..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7. 3.
  • 카운터포인트 / 차호지 방금 총성이 들렸다고 아침 조깅을 즐기던 외국인이 말했다. 나는 해변에 넘어져 있다. 아직 개와 산책하는 주인도 없는 모래사장에. 없는 모서리에 걸려 넘어지는 척을 했는데 정말 넘어져버렸다. 파도치는 해변을 보고 파도가 밀려가고 밀려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밀려가고 밀려오는 걸 이해하지 못하면서. 여기 봐요. 무릎에 모래도 조개도 묻지 않았어요. 아까 깨진 유리를 발로 밟았는데 상처도 없어요. 밟히는 게 없었거든요. 느낌이 이상해서 신발을 벗었는데 여기 바닥에 아무것도 없어요. 모래사장에서. 그렇게 여기서 같이 걷기로 한 사람과 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신기하다. 신기해서 같이 와보고 싶었어. 수화기 너머에서 그 사람은 춥다고 말했습니다. 감기에 걸렸느냐고 물으니 밖에 눈이 내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7. 3.
  • 사월 비 / 김연덕 쓰다듬거나 모으지 않아도 괜찮아  샌드위치를 반으로 자르고 빠져나온 아보카도를 줍고 들기 남김없이 먹기  손에서 손 아닌 걸 빼 보세요 무엇이 남는지 무엇이 가는지 무엇이 소리치는지 보고  그대로 두세요  그러니까 궁금해하지도 따뜻해지지도 움켜쥐지도 않기   세계는 이미 한 번 죽은 재료들  열렬하게 포기해  상한 냄새를 좋아해요   전등의 것도 식탁의 것도 아닌 그림자가  손바닥에 떠 있다  의지 없이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오늘은 우산을 들고 좋아하는 샌드위치 가게에 갈 거야  우산을 접고 안으로 들어갈 거야   이마에 떨어진 빗방울만 믿고   비가 오는구나  작게 뱉어 볼 것   떨지 않아도 좋지만  떨어도 좋다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5. 13.
  • 여수 / 서효인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도시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 다시는 못 올 것이라 생각하니 비가 오기 시작했고, 비를 머금은 공장에서 푸른 연기가 쉬지 않고 공중으로 흩어졌다 흰 빨래는 내어놓지 못했다 너의 얼굴을 생각 바깥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그것은 나로 인해서 더러워지고 있었다  이 도시를 둘러싼 바다와 바다가 풍기는 살냄새 무서웠다 버스가 축축한 아스팔트를 감고 돌았다 버스의 진동에 따라 눈을 감고 거의 다 깨버린 잠을 붙잡았다 도착 이후에 끝을 말할 것이다 도시의 복판에 이르러 바다가 내보내는 냄새에 눈을 떴다 멀리 공장이 보이고 그 아래에 시커먼 빨래가 있고 끝이라 생각한 곳에 다시 바다가 나타나고 길이 나타나고 여수였다  너의 얼굴이 완성되고 있었다 이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네 얼굴..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5. 13.
  • 하해 / 황인찬 "저기요, 죽지 마세요"  누가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마포대교를 걷다 가만히 멈춰 서 있을 때였다  그때 나는 수면에 반사되는 빛이 너무 아름다워서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게 아름다움이 싫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왜 아름답지?"  그건 네가 해안 절벽에 돌기둥이 서 있는 풍경을 보며 한 말이었다  돌기둥을 보고 사람을 기다리다 돌이 된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정말 사람 같네" 내 말에 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강은 서쪽을 향해 흐르고 있다  죽지 말라는 말을 한 사람은 저기 멀리 걸어가고 있었고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5. 9.
  • 사랑과 희망의 거리 / 김소연 우리는 서로가 기억하던 그 사람인 척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빗방울에 얼굴을 내미는 식물이 되고 싶었다고 말할 뻔했을 때  너, 살면서 나는...... 살면서 나는...... 그런 말 좀 하지 마 죽었으면서  귀가 아프네 나는 얼굴을 바꾼다 너무 많은 얼굴들이 주렁주렁 매달린다 가면이 열리는 나무였다면 가지 끝이 축 처졌을 것이다 아니, 부러졌을 것이다  사실은 이해를 하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깨로 얘기를 들어주고 있다 다가갔다 물러섰다, 빗방울이 앉았다 넓어졌다 짙어지는 우리의 어깨가 얼룩이 질 때  유리창 같다, 니 어깨는...... 고막이 있니, 니 어깨는......  필요한 말인지 불필요한 말인지 알 길이 없는 이 말은 하지 않기로 한다  빗방울의 차이에 대해 말할 줄 아는.. 공감수 0 댓글수 1 2024. 5. 9.
  • 그러니까 우리는 내내 그토록 들어가고 싶었던 곳에 그동안 내내 들어 있었던 거라고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농담을 오락으로 여기고 오락을 안심되는 것으로 여기는 문화에서 자란 학생들에게는 카프카의 위트가 접근 불가능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카프카의 유머를 '해득하지get'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유머란 '획득하는get' 것이라고 가르쳐온 것이 문제입니다. 자아란 '갖는 have' 것이라고 가르쳐온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학생들이 카프카의 농담에서 진정한 핵심을 음미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 핵심이란 이것입니다. 인간이 자아를 구축하고자 지독하게 분투한 결과는 그 지독한 분투로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인간성을 지닌 자아라는 것. 우리가 집을 향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여정을 밟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사실은 우리의 집이라는 것. ..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5. 7.
  • 끌어안는 손 / 이설빈 벼랑에 맺힌 불길한 사과처럼 천진하게 나는 낙하할 것이다 몸부림치는 씨앗에게로  소스라치는 너의 속눈썹에게로 겨울은 그을린 외투 주머니를 탈탈 털어대고 나는 불의 첨탑을 서둘러 완성하고 내가 뉘우칠 수 없도록 짓무른 열매를 위한 허공은 마련하지 않는다  그 끝에 움트는 장미의 장막이 익어가는 사과가 어떻게 피를 흘리는지를 네가 모르게 하고 네가 투명한 종처럼 슬픔의 원주를 터뜨리기 직전에 내가 어째서 뿔 달린 사막이 되어야 하는지를 나도 모르게 하고  모닥불의 손바닥이 피워 올린 사랑이 우리를 벗어나 뉘우치는 불빛 가장 가까이 퍼덕일 때 나를 몰아세운 파도와 파도의 무수한 벼랑을 기꺼이 잊게 할 때 나는 너의 절망이 되고 너는 절망이 삼킨 나의 비겁이 되고 나의 비겁이 되고  우리를 비집고 터져 나오는 ..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4. 30.
  • 적응하는 사람 / 이장욱 적응하는 사람은 조금씩 자신이 아니라서 좀 안 맞는 옷이나 신발을 착용한 채로도 어느덧 잘 걸어 다니고 외로움이라든가 암세포 에도 적응을 해서 어느덧 저녁의 공원에  공원은 공원이니까 빈 공간이 있고 빈 공간에는 텅 빈 시간도 있고 몇 년 전 당신이 한 말도 있지만 그래도  공원은 있다. 빌딩들 사이에 있다. 빌딩 안에서는 수많은 직원들이 움직이고 밤의 장례식에 가야 할 사람도 직원이다.  신기해라, 세상에는 언제나 오늘 죽은 사람이 있는데 그이가 죽은 세상에서도 직원은 역시 직원인데 직원은 직원의 일을 계속하기 때문에 그이의 없음에 익숙해진다. 그이도 자신의 없음이 익숙해지자 가만히 눈을 뜬다.  오늘이란 공전하는 별들의 조용한 배열 같은 것 수금..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4. 11.
  • 내가 저질렀는데도 알지 못한 실수들 / 이장욱 오늘은 종일 방에서 지냈는데도 실수를 저질렀네. 나는 혼자였고 어디다 전화를 걸지도 않았고 에스엔에스도 안 하는데 그러고도 실수를 인생은 이불 속에서…… 소문 속에서…… 시위도 못하고…… 흘러가는데 매일 실수를 실수에 대해 생각을 가령 내가 당신에게 인사를 안 했다. 소주를 퍼마시고 무례한 말을 했다. 남의 남이 퍼뜨린 소문을 믿고 너만 알고 있어, 이건 확실한 얘긴데 말야……라고 말을 꺼냈다. 사실 나는 인사를 잘하는 사람이고 술은 입에도 못 대고 입에서 입으로 건너다니는 이야기는 다 아니 땐 굴뚝의 연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인데 제가 무슨 실수를 한 거죠? 제가 왜 경찰서에 있죠? 내 존재 자체가 실수라는 뜻이야? 내일은 출근을 못 하겠다고 전화를 했다. 석양에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4. 11.
  • 뿔소라 / 김현 깊은 밤에 귀를 대보면 나는 무시무시한 것을 앞두고 있다 파도에 휩쓸려 가는 비치볼처럼 잡지 못해 이끌려 가는 영원한 사랑 개는 한동안 그대로 그렇게 허공을 향해 짖다가 가녀린 인간의 어깨 삐뚤어진 입술 빛바랜 눈동자 한 줌 영혼 여름 바다에 빠져 죽진 못하고 잃어버리고 집으로 돌아온 텅 빈 것을 믿고 따른다 혼자 꾸는 꿈이 대관절 멀리 가는 이유는 알맹이가 없어서 껍데기는 껍데기를 알아보고 개는 얌전히 사랑의 앞니가 빠져 헤벌쭉 웃는 인간을 품에 안고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존나 쿨한 척하는 인간치고 진짜 쿨한 인간 없음 죄다 암에 걸리고 손수건을 쥐여주면 눈물 흘리고 게딱지에 밥 비벼 먹는 애쓸수록 사랑스럽다 사람의 사람됨이여 뿔소라의 내장에는 독이 있다 사랑에 관해서라면 날뛰는 개에 대..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4. 1.
  • 창문 없는 방 / 숙희 부모가 있거나 없다는 이유로 부유하는 것이 싫어 이불 대신 사람을 덮고 잘 수 있을까? 물으며 낮아진 숨소리 튀어나온 뼈와 움푹한 뼈를 맞춰가면서 내 위에 너를 눕혔다가 네 위에 내가 누웠다가 서로의 몸이 닮기 위해 꼭 가족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아간다 우리도 태어나기 전에는 춥지 않았었는데 그곳으로부터 한참을 떠나 와버렸다 네 목소리만이 따스하다 잠들지 말고 계속 말을 해줘 잠들지 않고 둘러보면 없는 창문을 가려놓은 커튼이 펄럭였다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3. 26.
  • 겨울 / 이준규 해가 지고 있다. 해가 지고 있어. 그가 말했다. 그래 해가 지고 있지. 그녀가 말했다. 해가 지고 있으니 뭘 할까. 그가 말했다. 모르겠어. 그녀가 말했다. 술 마실까. 그가 말했다. 모르겠어. 그녀가 말했다. 울지 마. 그가 말했다. 안 울어. 그녀가 말했다. 울고 있는 거 같은데. 그가 말했다. 안 울어. 그녀가 말했다. 술 사 올까. 그가 말했다. 그래. 그녀가 말했다. 그는 술을 사러 나간다. 해 지는 겨울. 그가 술을 사러 나간 사이에 그녀는 죽지 않겠지. 그는 빨리 걷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있다. 그는 가게를 지나쳐 계속 걸었다. 그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해가 졌어. 그녀는 중얼거렸다.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3. 13.
  • 그리고 둘은 잠시 그 자리에 선 채로 이야기를 나눴다 중위의 할머니는 수로에서의 기억을 평생토록 혼자 간직하다가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 어린 손자에게 들려주었다고 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손자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정확히 모르는 채로 그런 이야기를 남겼다. 중위가 마른 손으로 피곤이 어린 얼굴을 쓸었다. 그가 먼저 돌아가겠다고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도 어쩐지 아무도 그를 붙잡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제 누구도 그가 왜 군인이 되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고, 그런 질문조차도 잊어버렸다. 사람들은 모두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들이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거나 까맣게 잊었던 것들을 떠올리며 그 거실에 함께 앉아 있었다. 현관을 나서는 그를 나선이 따라가 불렀다. 그가 반쯤 집 바깥으로 몸을 내밀고 나선을 돌아봤다. "이 모자요." 나선이 두 손 위에 구겨진..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3. 4.
  • 양양 / 전욱진 우리 여기 또 오자 그래, 그러자 그런 다짐에 언젠가 이 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저기 둘은 그 약속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 내가 할 염려는 아니지만 풋내기 서퍼들이 자기한테 알맞은 파도를 고르는 동안 모래 위 맨발인 나는 여전히 발아래를 걱정하며 걷습니다 기대를 저버린 날씨는 더욱 궂어져만 가고 결국 비가 올 것입니다 흐린 바다는 흐린 대로 좋네 그때의 내 대답을 궁리해보다가 어린애가 짓고 부순 저 모래성이 내가 아닐 리 없듯이 끝도 없이 들어오는 저 겹물결이 네가 아닐 리 없다고 들키기를 바라는 혼잣말도 생깁니다 아까 먹은 막국수 진짜 맛없었지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3. 4.
  • 눈보라의 끝 / 백은선 구름의 그림자 연기처럼 서로를 끌어안을 때 당신을 배우려고 먼바다를 건너왔어요 텅 빈 고층 빌딩들이 밤을 견디듯이 층계로 쏟아지는 유리구슬들 얼굴을 참는 얼굴 고백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핏속에서 사라지는 긴 지느러미 그림자가 엉켜 있는 골목 손바닥들 서로의 세포에 대고 속삭인다 손등이 가려워요 파도를 끌어와 무릎을 덮을 때 조용한 사람과 더 조용한 사람이 동시에 입을 떼는 순간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2. 28.
  • 실공 / 성다영 빈 나무를 올려다보며 누군가 말한다 잎이 왜 떨어지는지 알아요? 열매가 익으면 잎은 쓸모없기 때문이오 사람의 인과성은 습관적이다 시간만 있으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어 남자가 말하자 강아지가 고개를 한쪽으로 약간 기울인다 오디야, 이해하고 싶어? 오디의 이빨은 쌀알처럼 작고 쌀알처럼 강하다 단단하게 뭉쳐 있는 실공을 흐트러트린다 쉽게 부러지지 않는 나무토막도 씹어서 없앤다 이유 없이 사람을 물지 않는다 강아지라는 이유로 겁주는 사람은 물 것이다 그의 다리나 손가락을 세게 바람이 불지 않아도 가지가 움직인다 살아 있는 나무는 더 살아 있는 것 같고 더 살아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해도 몸을 기울인다 오디의 장난감에서 나온 실이 내 양말이나 가방에 붙어 있다 나는 몸에 붙은 실을 떼어내지 않는..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2. 12.
  • 터널안굽은길 / 성다영 공원을 걷는다 내가 이동한다 식도를 타고 빠르게 내려가는 차가운 액체처럼 거리는 옷을 고르고 너는 거리의 기분을 느낀다 너의 기분은 거리의 뒤를 따라오고 있다 연립주택 삼 층에서 이불을 터는 사람이 있다 시간이 너무 많은 것처럼 느껴져 불규칙한 먼지의 움직임 첫 문장 다음에는 두 번째 문장이 온다 두 번째 문장 다음에는 세 번째 문장이 온다 이것으로 무얼 해야 좋을까 나는 오늘 둘러본다 무한한 게시물 여기 되게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래 제발 내 것을 먹어줘 나는 멈춘다 사오 년 돈 모으면 여기 살 수 있겠지 멈춘다 왜 너는 그런다고 바뀌지도 않을 일만 골라서 하니 나는 계속한다 아무도 강간을 원하지 않는다 초록불 이불의 먼지와 함께 사람이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멈추고 걷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2. 12.
  • 보헤미안 랩소디 / 성다영 이제 나를 시작할 것이다 선언은 쉽다 대안이 대신할 수 없는 것을 대신하는 동안 조용히 손을 잡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남자 나는 꿈에서도 꿈을 꿔요 우리는 여기에 있다 집에 가 집에 가 엄마 나 여기 있어 돌아가 돌아가 부모가 널 낳은 걸 후회할 거야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우리가 신은 견디지 못하는 슬픔을 인간에게 주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봤다 너무 슬퍼서 죽은 사람들 커튼이 무거운 소리를 펼치며 내려온다 긴장을 품은 채 잠에 들고 깨는 매일 여행처럼 내일도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더 꿈같은 꿈을 꾸고 싶어 커피보다 커피잔이 뜨거워서 마시지 못하는 동안 한 사람이 노래 부른다 따뜻한 피부 펄럭이는 깃발 소리 여름에 더웠던 만큼 겨울에 추울 것이다 잎이 떨어진다 열매의 색이 짙어진.. 공감수 0 댓글수 1 2024. 2. 12.
  • 슈게이저* / 이성진 1 비가 관이 되어 내리는 밤이었어 우린 할 말이 없어서 그날의 날씨에 대해 이야기했지 날씨가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었으니까 합주실 창문 위로 걸어 다니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이빨 사이가 벌어져 있었고 바람 소리가 났어 우린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을 연주했어 앨범 러브리스만을 편애했던 우리는 중력이 사유하는 방향을 곧잘 흉내냈지 기타의 현을 위 아래로 갈기는 방법 없는 스트로크 우리가 우리를 잠시나마 떠나보내는 적절한 방식 고개를 내린 우리의 얇은 눈동자들이 컨버스 신발을 불태우고 있었어 신발 끝에서 모락모락 소용돌이 피어오르고 소용돌이가 우리들의 키만큼 커졌을 때 합주실은 이제 양귀비 꽃봉아리 안이야 이곳은 더 이상 한 점을 향해가질 않아 노이즈의 꽃들이 사방으로 날리고 솔직한 잠과 복잡한 밤이 서로의..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2. 12.
  • 낙원 아파트 로비의 야마하 시계 / 이성진 나 누가 앉았던 자리 너 바다 위에 떠있는 프로펠러 발음 겨울을 고독사라고 읽었다 걸었지 내가 밖에다 대고 우는 것 룰입니까 문입니다 스쳐가는 구두와 심각했던 얼굴들은 시간이고 걷다보니 납골당이다 사춘기 원근감이 사라진 직후 나는 내 집보다 오래 살지 못하고 먼저 죽은 개들을 애도하면서 얼굴들이 벽이 될 때 나의 슬픔이 너의 외로움을 자를 때 그럴 수 있다고 믿을 때 인생 음악을 듣느라 다 써버리는 것 계절 세상을 말아 태우고 이야기가 모두 끝날 때 나는 새였다 개가 늙는다 개 새를 보았다 날아갔으므로 지구에서 흘러나가는 노래들 돌아올 때는 한 명만 듣는다 공으로 오는 건 공뿐 포물선을 올려다 본 소녀는 다른 나라에서만 할머니가 되었다 1초가 아직 안 지난다 공감수 0 댓글수 1 2024. 2. 12.
  • 기민히 사라진 / 손유미 과거형으로 말해줄래? 단속을 마치고 문을 닫듯이, 오래 헤맨 문장에서 네가 빠져나가려고 하네 그래 과거형으로 말할게 달리 부를 수 없는 나의 동성 지인에게 그날의 우리는 공터에 드러누운 들개 같아서 충분히 길들었는데, 그걸 모르는 들개 같아서 너른 공터를 모두 내뛸 수 있을 것 같았다 누워 있을 때조차 힘이 넘치던 나의 대퇴근과 너의 둔근을 어쩔 줄 몰라 절절매던 밤이 아침으로 날들로 시간이 곤두박질쳐서 오늘로 나는 누워 있어. 과거형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누워 있었다. 누워 함께 떨며 지켜봤지 우리 대신 전속력으로 내달리던 덩치들을 충분히 바라봤다 쫓기는 심정 달리 부를 수 없는 심정 밤과 아침의 날들을 두들겨 패서 만든 곤죽을 손아귀에서 뚝뚝 떨어뜨리며 우리 누워서 말했다 그날 우리가 덩치들보다 먼저 ..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2. 12.
  • 평화전망대행 / 손유미 평화전망대에 가기로 했다. 터미널에서 만나기로.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했다. 대합실에 앉아 기다렸다.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 기다림을 맡기며 기다리는데 맞은편에 앉아 우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여자가 울며 다가왔다. 우는 여자가 울며 우리를 따라다녔다. 버스도 택시도 우리를 태워주지 않네. 하는 수 없이 조금 걷는데 우는 여자가 울며 손을 흔들자 승용차 한대가 멈춰섰다. 울적해 보이는 운전자가 우리를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우는 여자가 조수석에 앉아 울며 잤다. 울적해 보였던 운전자는 교통방송을 들으며 차선을 이리저리 바꿨다. 운전을 정말 잘해서 아무도 깨지 않았다. 평화전망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분증 검사를 하고 표를 끊어야 했다. 매표소 직원이 평화와 맞먹는 담보가 있느냐고 물었다. 운전자..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2. 12.
  •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고, 그는 나를 두 번 치고 다시 두 번 쳤다 나는 그 늙은 남자 앞에 섰다. 그는 간신히 나를 알아채는 것 같았다. 내가 말했다. "내가 알마예요." 바로 그때 그녀를 보았다. 마음이 갈 길을 일러준다고 해서 정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느냐는 건 참 기이한 일이다. 그녀는 내가 기억하던 모습과 달랐다. 그런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두 눈은 내가 그녀를 알아볼 수 있는 수단이었다. 이렇게 천사를 보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마. 내가 가장 사랑하던 나이에 머물러 있다니! 나는 물었다. "알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름인데, 꼬마 아가씨가 어떻게 알지?" 내가 말했다. "내 이름은 『사랑의 역사』라는 책에 나오는 모든 여자애의 이름을 따서 지은 거예요." 내가 말했다. "내가 그 책을 썼지." "아, 전 진담이에요. 그건 진짜 책이라고요." 내가.. 공감수 1 댓글수 1 2024. 2. 7.
  • 여름 / 강지이 그곳에 영화관이 있었다 여름엔 수영을 했고 나무 밑을 걷다 네가 그 앞에 서 있기에 그곳에 들어갔다 거기선 상한 우유 냄새와 따뜻한 밀가루 냄새가 났다 너는 장면들에 대해 얘기했고 그 장면들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은 것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어두워지면 너는 물처럼 투명해졌다 나는 여름엔 수영을 했다 물 밑에 빛이 가득했다 강 밑에 은하수가 있었다 공감수 0 댓글수 1 2024.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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