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 김민정

홍제 2023. 3. 9. 22:45

  좀 돌았으면 하고 꿈을 꿀 때 나는 캥거루를 만난다. 묵찌빠ㅡ묵찌빠 져야 기분 좋은 게임에서 캥거루는 묵밖에 낼 수 없는 잘린 발가락의 오므린 발등으로 내 얼굴을 내갈기는데 세시 정각의 시침처럼 드러누운 그림자, 나는 분침처럼 째깍거리는 기쁨에 서 있다. 도망칠수록 가까워지는 함정, 너 대머리 정부(情夫)는 쭈글쭈글한 제 성기에 박힌 까만 점을 사인펜 툭 떨어진 자리라며 연신 침을 발라 빡빡 지워대고 앉았는데 그래서 낸들 어쩌라고! 나는 빨랫줄에 목을 감아 고치로 새로이 태어나는 사형수를 질투하며 알알이 저 뜨거운 태양을 삼키고 또 삼킨 채 짓물러가는 한 덩이의 포도송이를 모방중이다. 그리하여 다시

 

  1986년 여름,

 

  남이섬 특설 무대에 오른 그 여자, 유미리가 앙코르를 하기 위해 마이크를 틀어쥐고 있다. 고맙습니다. 또 고맙습니다. 안개꽃다발에 파묻힌 155센티미터의 재미교포 대학생 유미리가 울먹울먹 안개 속을 걸어봐도 채워지지 않는 빈 가슴을 노래할 때 난데없이 야유의 휘파람과 함께 날아든 끈 풀린 군화 한 짝. 내 젊음에 빈 노트에 무엇을 채워야 하나. 스무 살 유미리의 하얀 미니스커트에 찍힌 그래 그 지울 수 없는 발자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