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선 면 / 고민형
김환기 미술관에 비가 내린다
전면
유리 밖의 비는 고요하다.
미술관의 직원이 내게 다가와 말한다,
비가 참 많이 오네요.
직원이 내 옆에 앉는다.
비는 점, 선, 면
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그림이다,
라고 어느 화가가 말했답니다.
내가 대답한다,
그런가요? 비는 오래된
기상 현상이죠.
물론
그렇습니다.
직원이 계속 말한다,
김환기 선생님은 파리에서 저런 비를 맞으며
그림을 그렸어요.
어둡고 푸른 배경에 검은 점을 수없이 찍었죠.
그림에 대해서 아시는 분인가요? 내가 대답했다, 좆도
모릅니다.
내가 묻는다,
김환기 씨는
외로웠을 것 같아요.
직원이 대답한다,
아니요.
선생님의 곁에는 여사님이 계셨죠.
제가 생각하기에,
내가 말한다,
점, 선, 면
그건 너무 많이 가진 사람만 그릴 수 있어요.
배짱이 두둑해야 하죠. 일단 물감을 뿌려놓고 기다려요.
거기서 우주를 보는 외계인 같은 사람들이요.
눈이 크고 귀가 작고
팔다리가 야위었죠.
그들은 창밖을 보지 못하고
그림 속에서 별을 보기 위해
평생을 살죠.
성공하고 싶으신가요, 이렇게 비가 내리는데?
네?
우산은 있으시냐고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
제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요.
비가 오고 있다고
거기서 할머니가 떠오른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저는 할머니가 그립지 않거든요.
오 이런. 직원이 말한다,
할머님이 돌아가셨나 보군요.
네, 얼마 전에.
김환기 씨도 부인을 먼저 잃으셨나요?
직원이 대답한다,
아니요. 선생님은 부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셨어요.
무자비하게
비가
내린다.
직원이 말한다,
6시에 문을 닫아야 해요.
그걸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내가 말한다, 소묘에서
곡선은 없다고 배웠어요.
직선만으로 원을 그렸죠.
언제 그림이 끝나는 건지 잘 몰랐어요.
그림자를 그릴 때는
새까맣게
될 때까지 채워야 했어요.
한 방향으로 선을 겹겹이 쌓았고
나뭇잎을 그릴 때는
비슷한 색을 덧칠했어요.
어느 날은 수백 개의 이파리를 단
나무가 완성되었고
어느 날은 아무도 나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원은 깎여나갔고 그림자는 검어졌죠.
저녁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갔어요.
돌아갔지만 어쩐지 끝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랬군요. 저기 할머님 일은 안됐어요.
좋은 곳으로 가셨길 바랄게요.
그러니 이제. 할머니는
죽은 척하며 누워 있던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이
공평하게 칼에 찔리고
불에 타던 곳에 있었대요.
할머니의 백숙 안에는 내장이 들어 있었어요.
나는
간과 콩팥을 먹었어요.
깍두기 국물을 입술에 묻히면
할머니가 손으로 닦아주었고
난 배가 불렀어요.
기억나는 말은
먹어.
먹으라고.
먹어.
그녀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쩌죠?
나를
점, 선, 면을
그림을
비를
식사가 끝나고도
전쟁이 끝나고도
이어지는
엎질러진 물감처럼
줄줄줄 흐르는 이것들을
직원이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일어나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버튼을 누르면
갑자기 펴지는 우산을 쓰고
자갈밭 길을 걸었다.
더욱 쏟아졌다.
미술관을 나와도
그치지 않았다.
내 몸에 닿았다.
잠깐씩 잠깐씩
그것이
무게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