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도시가스 / 이수명
홍제
2023. 6. 3. 22:57
바람 좀 쐬고 올게
무를 사 온다. 뭇국을 끓이자
무를 씻고 자른다. 작은 네모로 잘린 무의 조각들
똑같고 분별하기 힘들고 한입에 먹기가 쉽고
이 집에서 무슨 무를 자르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물구나무서기를 5분 더 하고
집 안에 들어온 벌레들이 돌아다니게 내버려두자
발에 밟히는 벌레들 문틈으로 계속 들어와도 신경 쓰지 말자
어디선가 낮은 허밍 소리가 들려오고
시간이 충분하니
응 충분해
올라오는 거품들을 국자로 조금씩 걷어낼 시간
미처 다 보지 못할 시간
무에 난 작은 작은 구멍들을
뭇국이 끓는다.
이 집에서 무슨 무를 끓이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가스레인지에서 푸른 불꽃이 올라온다.
가스 불을 세게 했다가 서서히 줄인다.
국이 끓어 넘치지 않도록
무턱대고 이 낮은
단조로운 허밍을 따라가는 거야
아무도 모르게 허밍을 시작하는 거야
허밍에서 허밍으로 스러져가는 거야
바람 좀 쐬고 올게 가스 불을 약하게 켜두고
식사를 차리는 것을 미루고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거리는 것을 보고 올게
나무 아래로 환자복을 입은 환자들이 여럿 앉아 있고
한 환자는 처음 듣는 노래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