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화분에 물 주기 / 이근화

홍제 2023. 6. 11. 16:28

  어디에서 날아온 씨앗일까

  누가 파 온 흙일까

  마시던 물을 일없이 빈 화분에 쏟아부었더니

  며칠 지나 잎이 나왔다

  욕 같다

  너 내게 물 먹였지

  그러는 것 같다

  미안하다 잘못했다

  그러면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볕이 잘 드는 곳으로 옮겨주었다

  몰라봐서 미안하다

  그런데 끝까지 모르겠다

  너 누구니, 아니 댁은 누구십니까

  잎이 넓적하고 푸르다

  꽃 같은 것도 피울 거니

  그럼 정말 내게 욕을 하는 거야

  안녕하십니까, 묻지 마 내게

  당황스럽잖아 나더러 어쩌라고

  계속 물을 주어야 한다

  불안하면 지는 거다

  그런데 더 주어야 하나 덜 주어야 하나

  그늘을 좋아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는 거다

  너는 어디서 왔니

  족보를 따지는 거다

  상상하는 거다

  너 아무것도 아니지

  나의 몽상이구나

  나란 망상이구나

  죽고 없는 거구나

  잘 살기란 온전하기란

  불가능한 거구나

  빈 화분에 물을 주며

  나는 하루하루 시들어간다

  최선을 다해 말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