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들 / 강보원

홍제 2023. 6. 26. 22:43

  그는 걸었다. 그는 한참 전에 천 가게를 지나쳐 왔다. 그는 그 뒤로도 계속 걸어서, 이제는 딱히 상가가 보이지 않는 한적한 길을 걷고 있었다. 한적한 길을 그는 걸었다. 가끔 동네 식당을 지나긴 했지만 별로 지나쳤다고 할 만한 가게가 없었다. 한적한 길이었다. 한적한...... 그러다 그는 자신이 가로수를 계속 지나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내가 가로수를 지나치고 있다는 생각을 진작 못했지?

 

  그는 걸었다. 그는 한적한 길을 걸었다. 그는 가로수 하나를 지나치고, 가로수 둘을 지나치고, 가로...... 그는 자리에 멈췄다. 문제는 가로수가 너무 촘촘히 심어져 있어서 '가로......'까지만 적어도 이미 하나의 가로수를 지나친 후라는 것이었다. '가로수 하나를 지나치고'까지 적었을 즈음에는 이미 두셋의 가로수는 지나친 후였다. 그는 '가로수 둘을 지나치고'라고 적었을 때 실제로 그가 몇 그루의 가로수를 지나쳤는지 세어 봤다. 총 여섯 그루였다. 조금 빨리 걸은 셈이었다. 그는 여섯 그루의 가로수를 지켜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여섯 그루의 가로수는 그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가령 그것은 긴 코로 눈을 비비던 파란 코끼리처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는 약간의 고민 끝에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는 천천히 걷기로 했다. 가로수를 지난 것을 기록할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그는 천천히 걸었다. 가로수 하나를 지나고, 가로수 둘을 지나, 가로수 셋을 지나, 가로수 넷을 지나, 가로수 다섯을 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