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구는 푸른 눈썹을 그리기 시작하고 / 김박은경

홍제 2023. 7. 22. 19:10

  죽었다 살아나는 건 기적이지

  살다 죽는 것을 기적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그렇게 고정하였다 고정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사동과 피동 사이에는

  상태들이 존재하지

 

  그럴 수 있다고 말하면 그럴 수 있다

  그렇게나 기적을 원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당신이 없으면 죽을 거야 하지만

  정말로 죽지는 않을 거야, 알잖아

  그래도 죽게는 될 거야

  그렇기는 하지만

 

  기적을 믿는 게 기적이니까

  조금 더 사랑하려고 그래

  기적이 필요해서 그래

 

  이것이 사랑인가 의심하면 이상해지는

  이렇게 끝없이 넣어도 될까 의심하며

  열어보는 순간 태초부터 외로운

  누군가 거기 앉아 있다

 

  맞춤한 상자를 뒤집어쓴 채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면서

  처음에 그랬어 다음에도 그랬어 그러면

  그다음도 그럴까 그런 것이 기적인가

  거의 기적 같은가

 

  상자의 벽을 노크하듯 두드린다

  샌드백처럼 두드린다 발로 찬다

  그러지 마, 너무 멀다 말해도

  아무도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당신이 죽었다는 소문이

  소식이 되어버린 저녁에는

 

  커다란 세탁기를 돌린다

  돌리다 보면 돌다 보면

  하얗게 새하얗게 기적적인

  회귀가 가능할 것 같아

 

  버린 줄만 알았던 글자들이

  우우우우 우우우우

  소리치겠지

 

  그래도 다녀오겠습니다

  그래서 다녀오겠습니다

 

  상자는 인과를 벗어나

  무한히 무한해지니까

 

  사라지는 것이 사라지는 것도

  기적일 수 있으니까

 

  검지도 희지도 않은 모호한 세계를

  진자처럼 반복하면서 다음이 그다음을

  향할 수 있도록 저마다 최선을 다하는 게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천지사방 옹벽들은 검은 날개를 퍼덕이고

  죽은 자들이 산 자의 어깨에 기대는 밤

  부재하는 유언을 알 것만 같은데

 

  무구는 푸른 눈썹을 그리기 시작하고

  무구는 언제나 그리기 시작하고

 

  세계는 둥글게 되풀이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