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칸나꽃 / 최정례

홍제 2023. 2. 8. 10:29

 너는 칼자루를 쥐었고

 그래 나는 재빨리 목을 들이민다

 칼자루를 쥔 것은 내가 아닌 너이므로

 휘두르는 칼날을 바라봐야 하는 것은

 네가 아닌 나이므로

 

 너와 나 이야기의 끝장에 마침

 막 지고 있는 칸나꽃이 있다

 칸나꽃이 칸나꽃임을 이기기 위해

 칸나꽃으로 지고 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슬퍼하자 실컷

 첫날은 슬프고

 둘째 날도 슬프고

 셋째 날 또한 슬플 테지만

 슬픔의 첫째 날이 슬픔의 둘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둘째 날이 슬픔의 셋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셋째 날이 다시 쓰러지는 걸

 슬픔의 넷째 날이 되어 바라보자

 

 상갓집의 국숫발은 불어터지고

 화투장의 사슴은 뛴다

 울던 사람은 통곡을 멈추고

 국숫발을 빤다

 

 오래가지 못하는 슬픔을 위하여

 끝까지 쓰러지자

 슬픔이 칸나꽃에게로 가

 무너지는 걸 바라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