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 김경주

홍제 2023. 2. 24. 15:04

  어쩌면 벽에 박혀 있는 저 못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깊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쪽에서 보면 못은

  그냥 벽에 박혀 있는 것이지만

  벽 뒤 어둠의 한가운데에서 보면

  내가 몇 세기가 지나도

  만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못은

  허공에 조용히 떠 있는 것이리라

  

  바람이 벽에 스미면 못도 나무의 내연(內)을 간직한

  빈 가지처럼 허공의 희미함을 흔들고 있는 것인가

 

  내가 그것을 알아본 건

  주머니 가득한 못을 내려놓고 간

  어느 낡은 여관의 일이다

  그리고 그 높은 여관방에서 나는 젖은 몸을 벗어두고

  빨간 거미 한 마리가

  입 밖으로 스르르 기어 나올 때까지

  몸이 휘었다

 

  못은 밤에 몰래 휜다는 것을 안다

 

  사람은 울면서 비로소

  자기가 기르는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