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 진은영
맑은 술 한 병 사다 넣어주고
새장 속 까마귀처럼 울어대는 욕설을 피해 달아나면
혼자 두고 나간다고 이층 난간까지 기어와 몸 기대며 악을 쓰던 할머니에게
동네 친구, 그애의 손을 잡고 골목을 뛰어 달아날 때
바람 부는 날 골목 가득 옥상마다 푸른 기저귀를 내어말리듯
휘날리던 욕설을 퍼붓던 우리 할머니에게
멀리 뛰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아도
"이년아, 그년이 네 샛서방이냐"
깨진 금빛 호른처럼 날카롭게 울리던
그 거리에 내가 쥔 부드러운 손
"나는 정말 이애를 사랑하는지도 몰라"
프루스트 식으로 말해서 내 안의 남자를 깨워주신 불란서 회상문학의 거장 같은 우리 할머니에게
돈도 없고 요령도 없는 작곡가 지망생 청년과 결혼하겠다고
내 앞에서 울 적에 엄마 아버지보다 더 악쓰며 반대했던 나에게
"너는 이 세상 최고 속물이야, 그럴 거면서 중학교 때 『크리스마스 선물』은 왜 물려주었니?"
내가 읽다 던져둔 미국단편소설집을 너덜거리는 낱장으로 고이 간직했던 여동생에게
"나는 돼도, 너는 안돼"
하지 못한 말이 주황색 야구잠바 주머니 속에서 오래전 잘못 넣어둔 큰 옷핀처럼 검지손가락을 찔렀지
엄밀한 空의 논리에 대해 의젓하게 박사논문까지 써놓고
이제 와 기억하는 건
용수스님이 예로 드신 무명 옷감에 묻은 얼룩
그 얼룩은 무슨......덜룩
시인 김이듬이 말한 것처럼
그거 별 모양의 얼룩일라나, 오직 그 모양과 색이 궁금하신 모든 분들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십년 만에 집에 데려왔더니, 넌 아직도 자취생처럼 사는구나, 하며 비웃음인지 부러움인지 모를 미소를 짓던 첫사랑 남자친구에게
이 악의 없이도 나쁜 놈아, 넌 입매가 얌전한 여자랑 신도시 아파트 살면서
하긴, 내가 너의 그 멍청함을 사랑했었다 네 입술로 불어넣어 내 방에 흐르게 했던 바슐라르의 구름 같은 꿈들
여고 졸업하고 6개월간 9급 공무원 되어 다니던 행당동 달동네 동사무소
대단지 아파트로 변해버린 그 꼬불한 미로를 다시 찾아갈 수도 없지만,
세상의 모든 신들을 부르며 혼자 죽어갔을 야윈 골목, 거미들
"그거 안 그만뒀으면 벌써 네가 몇 호봉이냐" 아직도 뱃속에서 죽은 자식 나이 세듯
세어보시는 아버지, 얼마나 좋으냐, 시인 선생 그 짓 그만하고 돈 벌어 우리도 분당 가면, 여전히 아이처럼 조르시는 나의 아버지에게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잔뜩 걸린 옷들 사이로 얼굴 파묻고 들어가면 신비의 아무 표정도 안 보이는
내 옷도 아니고 당신 옷도 아닌
이 고백들 어디에 걸치고 나갈 수도 없어 이곳에만 드높이 걸려 있을, 보여드립니다
위생학의 대가인 당신들이 손을 뻗어 사랑하는
나의 이 천부적인 더러움을
반듯이 다려놓을수록 자꾸만 살에 눌어붙은 뜨거운 다리미질
낡은 외상장부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미국단편집과 중론(中論), 오래된 참고문헌들과
물과 꿈 따위만 적혀 있다
여보세요, 옷들이여
맡기신 분들은 찾아 얼른 가세요. 양계장 암탉들이 샛노랗게 알을 피워대는 내 생애의 한여름에
다들, 표백제 냄새 풍기며 말라버린 천변 근처 개나리처럼 몰래 흰 꽃만 들고
몸만 들고 이사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