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제
쌓아 올려 본 여름 / 황유원 본문
여름이다
혼자 점심을 사 먹고 운동장 계단에 앉아 있는 여름
괜히 끊었던 담배 한 갑을 사서 정말 딱
한 대만 피우고 계단 위에 누워 보는 여름이다
개미들이 무언갈 미친 듯이 찾아 헤매는 여름
동네 아저씨 하나 학교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고
오갈 데 없이 앉아 보는 여름이고
딱 한 대 피운 담배곽을 모르는 누군가에게 통째로 줘버리는 여름
그 누군가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눈알 속의 여름이다
개미들아 내게 올라타서 놀다 가라
더 이상 날지 못하고 천천히 기는 매미들아
내 옆에 와서 생을 마쳐라
고장 난 티비나 세탁기 컴퓨터 삽니다
그래도 괜찮다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나는 콘크리트 위에서 죽은 매미의 몸을 흙 위로 옮겨주는 여름이고
공 차는 소리와 구름이 흘러가는 색깔이 구분되지 않는 여름
누워 있는 나를 슬쩍 구름 위로 옮겨 주는
힘이 남아돌고 시간이 남아도는 여름이다
아까 그 아저씨가 애들이 하는 축구를
승부차기까지 다 보고 있는 여름이고
그물은 골의 힘만큼이나 출렁이다가
곧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여름
여름은 이윽고 자리를 비우고 잠시 화장실에 갈 것이다
수돗물 틀어 놓고 그 소리 듣고 있자면
잠시 폭포 앞에 서 보는 기분
여름이다
땀과 물이 뒤섞여
배수구로 집중되고 있는 여름
잠깐 누워 있던 여름이 깜박 조느라
구름 떼로부터 도처에 자유낙하 중인 여름
오면 오고
가면 가는 여름이다
짧은 치마를 입고 또각또각 걸어가는 여자보다는
그 여자의 다리와 불룩한 궁둥이를 멍하니 쳐다보다 고개를
돌리고 마는 노인의 표정에 더 반응해 보는 여름
너는 자꾸 치마를 끌어내리고
나는 여름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본다
여름이다
지난해 여름에 이어
또다시 여름
내년 여름은 아직 안 왔지만
내년에도 여름은 오는 거겠지
어떤 확신에 가까운 여름
여름에게도 얼굴이라는 것이 있다면 참
볼만할 거야
운동장처럼
하얗게 웃고 있을지도
모든 것을 증발시키며
정신이 증발했을 때
홀로 버려질 몸뚱이처럼
드러누워 있는 운동장 위에 홀로
드러누운 여름
나는 여름의 타오름 속에 슬쩍 몸을 끼얹고
잠시 같이 타올라 보는
여름
여름이다
여름이고
여름이고
여름이고
여름
나는 돌을 쌓듯이 거기 여름을 쌓아 놓고
발로 한번 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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