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제
백주와 대낮이 아닌 백주대낮의 풍경 본문
한여름 땀 뻘뻘 흘리며 대학교 다니던 시절 5000번 버스의 커튼을 열어젖히자 바깥 풍경과 환한 햇살이 차 안으로 쏟아져들어오던 기억을 나는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 말 그대로 백주대낮이었다. 사실 백주대낮이라는 말은 백주라는 단어가 이미 대낮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불필요하게 동어를 반복하는 군더더기 표현이라 할 수 있지만, 우리는 종종 백주 혹은 대낮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어떠한 광경을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럴 때 백주대낮은 무식하고 불필요하게 같은 말을 거듭하는 군더더기 용어가 아니라, 정확하게 기억하고 정확하게 표현해야 마땅한 무언가를, 정말로 정확하게 기억하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하는 적확한 용어가 된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을 매년 되풀이하는 것이 누군가에겐 불필요하게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서는 꿋꿋하게 같은 말을 반복해야만 한다고 꿋꿋하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 왜? 그것은 불필요한 일이 아니고, 우리는 백주대낮의 풍경을 두고 그것을 백주 또는 대낮이 아닌, 백주대낮이라고 정확히 말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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