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제
원숭이의 시 / 이장욱 본문
당신이 혼자 동물원을 거니는 오후라고 하자.
내가 원숭이였다고 하자.
나는 꽥꽥거리며 먹이를 요구했다.
길고 털이 많은 팔을 철창 밖으로 내밀었다.
원숭이의 팔이란 그런 것
철창 안과 철창 밖을 구분하는 것
한쪽에 속해 있다가
저 바깥을 향해 집요하게 나아가는 것
당신이 나의 하루를 관람했다고 하자.
당신이 내 텅 빈 영혼을 다녀갔다고 하자.
내가 당신의 등을 더 격렬하게 바라보았다고 하자.
관람 시간이 끝난 뒤에 드디어
삶이 시작된다는 것
당신이 상상할 수 없는
동물원의 자정이 온다는 것
당신이 나를 지나치는 일은
바로 그런 것
나는 거대한 원숭이가 되어갔다.
무한한 어둠을 향해 팔을 내밀었다.
꽥꽥거리며
외로운 허공을 날아다녔다.
이것은 사랑이 아닌 것
그것보다 격렬한 것
당신의 생각이나 의지를 넘어서는 것
여기 한 마리의 원숭이가
있다는 것
원숭이의 시에 당신이 등장한다고 하자.
내가 그 시를 썼다고 하자.
내가 동물원의 철창 밖을
밤의 저편을
당신을
끈질기게 바라보고 있다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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