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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

적응하는 사람 / 이장욱 본문

적응하는 사람 / 이장욱

홍제 2024. 4. 11. 16:53

 

 적응하는 사람은 조금씩 자신이 아니라서

 좀 안 맞는 옷이나 신발을 착용한 채로도 어느덧 잘 걸어 다니고

 외로움이라든가

 암세포

 에도 적응을 해서 어느덧

 저녁의 공원에

 

 공원은 공원이니까

 빈 공간이 있고

 빈 공간에는 텅 빈 시간도 있고

 몇 년 전 당신이 한 말도 있지만 그래도

 

 공원은 있다.

 빌딩들 사이에 있다.

 빌딩 안에서는 수많은 직원들이 움직이고

 밤의 장례식에 가야 할 사람도

 직원이다.

 

 신기해라, 세상에는 언제나 오늘 죽은 사람이 있는데

 그이가 죽은 세상에서도 직원은 역시

 직원인데

 직원은 직원의 일을 계속하기 때문에

 그이의 없음에 익숙해진다.

 그이도 자신의 없음이 익숙해지자 가만히

 눈을 뜬다.

 

 오늘이란 공전하는 별들의

 조용한 배열 같은 것

 수금지화목토천해…… 같은 것

 별 하나가 지워져 있어서 조금씩 이상하다가

 조금씩 익숙해지다가

 잊었다.

 

 하지만 자정의 외로운 배회라든가

 외진 골목에서 누가 나를 부르는 소리

 뒤를 돌아보았는데 아무도 없는 골목 끝에서 불현듯

 내가 내 손목을 긋는 모습

 에도 적응이 되는가?

 

 나는 지금 횡단보도에 나란히 선 부적응자들을 바라본다.

 먼 신호를 기다리는 그이들을 다정하게 불러본다.

 부적응자들이여,

 부적응자들이여,

 적응을 하고 난 뒤에는 옷이 사라지고 신발이 사라지고 또

 사랑하는 이가 사라지리라.

 

 나는 처음 와보는 공원에 앉아 있다. 마침

 뒤뚱거리며 걸음을 연습하는 저 아기는

 무엇에 적응하고 있는가?

 중력에? 허공에? 지구의 회전에?

 아기가 불현듯 내 쪽으로 몸을 돌려

 갸우뚱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공원에는 아기 아빠도 아기 엄마도 보이지 않는데

 나는 내가 사라진 뒤의 세상에

 적응하는 사람인데

 직원이 슬픈 표정으로

 빌딩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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