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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

컵이 서로 붙으면 / 이기리 본문

컵이 서로 붙으면 / 이기리

홍제 2023. 11. 5. 22:32

 나가기 싫었지만 억지로 끌려 나와 수목원을 한 바퀴 돌았고

 금붕어들이 다채로운 흐름으로 유영하는 것을 보다가

 땅에서 사는 기분을 실감했다

 물속에서만 살 수 있다는 건 너무 막막해

 

 걷기 싫어도 걸어야 하는 길이었고

 앞이 무섭다고, 목마를 태워주는 아버지에게 너무 높다고

 자신을 내려달라고 하는 아이

 언덕질수록 내려가는 발목에 힘이 더욱 드는 것

 

 마음에 드는 풍경을 배경 삼아

 사진이라도 찍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촬영 버튼을 누를 때마다 프레임 안에 턱턱 걸리는 옆모습들

 오롯이 혼자이고 싶은데, 온전한 인물 사진은 포기했고

 

 배고프지 않지만 대화마저 끊을 수는 없어서

 요리라도 해주기로 했다

 와인을 곁들인 저녁 식사를 기대했겠지만

 식은 밥으로 만든 볶음밥만을

 입안으로 욱여넣는

 

 왜 밥을 다 먹고 물을 꼭 마시는 걸까

 끝을 낸 뒤에 투명한 유리컵에 담긴 물을 마시면

 많은 일들을 넘길 수 있는 걸까

 

 말없이 밥을 먹고 말없이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빈 그릇들부터 닦으려다 공간이 부족해

 두 개의 유리컵을 위아래로 포개두었다

 

 이제 이것만 닦으면 되는데, 안 빠진다

 아무리 세게 쥐고 돌려보아도

 두 컵이 서로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이거 왜 안 떨어지냐고 물으니

 이런 일엔 꼭 이유가 궁금하지, 대답한다

 

 마찬가지야, 잘 모르겠지만

 두 컵의 틈에 끼인 물이

 서로를 꼭 붙들지 않겠느냐고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떼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방법은

 붙어 있는 두 컵을 감싸 쥐고

 지금 서 있는 이 바닥에 내던지는 방법뿐이었다

 

 이어져야 할 침묵은 계속 이어졌고

 문득 동시에 입을 열면

 서로 먼저 말하라고 하고는 다시 입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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