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제
비밀과 유리병 / 이기리 본문
오래전 좋아했던 선배 집엔 뉴기니아 한 마리가 있었다
나는 수업이 일찍 끝나면 언덕바지에 있는 선배 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며 그 새를 바라보는 시간을 좋아했다
우리가 탁자에 놓인 빈 유리병에 담겼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말하는 동안
오목하고 하얀 새장 안에서 뉴기니아는 홰에 가만히 앉아
자신의 붉은 깃털을 뽑고 있었다
그건 털갈이를 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몸 안쪽까지 파먹는 부리의 어둠을 떠올리자
창밖에선 해가 지고 있었다
채광이 좋은 남향집에서 선배와 저녁을 맞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한 손으로 감쌀 수 있는 이 작고 깨끗한 유리병을
언제나 우리 사이에 올려 두고
학교에서 나오는 길에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죽었어, 알고 있었어?
그 이 후로도 우리는 몇 번 더 저녁을 먹고 차를 마셨다
더 이상 바라볼 새가 없고 죽은 새를 이야기하지 않고
해가 지는 풍경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쥐고 있던 유리병을 놓쳤다
흠 하나 없이 투명한 유리병을 보이지 않는 비탈길의 끝을 향해 굴렀다
선배는 그 안에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고 했다
나는 유리병을 주워 최초로 담을 것을 생각하며 걸었다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슬픔을 표현하는 네 개의 선 / 김누누 (0) | 2023.02.13 |
---|---|
데리러 가 / 김누누 (0) | 2023.02.13 |
정말 사과의 말 / 김이듬 (0) | 2023.02.10 |
0도의 밤 / 하재연 (0) | 2023.02.10 |
광교 / 박다래 (0) | 2023.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