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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

슬픔을 표현하는 네 개의 선 / 김누누 본문

슬픔을 표현하는 네 개의 선 / 김누누

홍제 2023. 2. 13. 10:11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그림을 그려 왔다

  얼굴을 그린 거야? 물으니 아이는 슬픔을 그린 거라 대답한다

  어린이집에서 슬픔을 배워 왔다고

 

  아이는 슬픔 발음이 어려운지 자꾸 ㄹ을 ㅅ으로 발음한다

  이 그림이 좋아?

  아이는 그림이 좋다며 일억 초 만에 일억 개도 그릴 수 있다고 한다 일억은 얼마 전에 아이가 접한 가장 큰 숫자이다 아이는 아직 일억보다 큰 숫자를 모른다

 

  아이는 불리한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 대신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내 슬픔을 그리기 시작한다

  열 번만 그리고 손 씻는 거야 알았지? 약속

  일억을 알게 된 아이에게 열 번은 너무 작은 숫자이다

 

  슬픔이가 그렇게 좋아? 라고 물으면

  아이는 슬픔이가 아니라 슬픔이야라고 답한다

 

  선생님이 슬픔이 뭐라고 말씀해 주셨어?

  라는 질문은 아이에게 불리한 질문인 것 같다

  아이는 점점 그림 같은 표정을 짓는다

 

  손 씻고 나면 멍멍이 보러 공원 갈까? 라고 말하면

  아이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돈다 그러나 다시 시무룩해지고

 

  밖에 멍멍이 없어

  응? 멍멍이가 없다니?

  몰라 멍멍이 없어

 

  아이는 그림을 마구 그린다 정말 일억 초만에 일억 개를 그리려는 듯이

  열 번만 그리기로 했잖아

  아이는 자기가 불리할 때면 입을 꾹 다문다

  오후 다섯 시가 되면 아이는 어린이 채널에서 방영해 주는 짱구는 못 말려를 본다 아이가 그린 슬픔들이 장난감들과 함께 거실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이는 곧 짱구보다 나이가 많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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