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제
어느 하루 / 이기리 본문
섬진강을 지나고 있다. 여긴 해남인데 계속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섬진강을 지나고 있다고 중얼거린다
운구 버스에 탄 가족들은 모두 커튼을 치고 자고 있다
야간열차를 탄 것처럼 내부가 조용하고
이틀 전에는 비바람이 크게 불었었는데
나는 구름 사이사이로 내려오는 햇살, 에메랄드색을 가진 남쪽 바다와
반짝이는 윤슬을 보며 참 아름다운 풍경이다, 낮고 깨끗한 목소리로
그들이 깨지 않을 정도로만 나직이 말한다
짐칸에서도 안락한 잠을 자고 있을 할아버지를 깨우지 않으려고
버스는 적정 속도를 잘 지키며 달린다, 지금은 빨간불 앞에서 멈추는 중
오늘만 지나면 다시 운동을 열심히 하고 밥도 잘 챙겨 먹자
의자를 당기고 책상에 바짝 앉아 공부를 하자
화장터에 가까워질수록
밖을 보면 호프집이나 과일 가게 정육점 무화과를 파는 트럭 같은 게 더 눈에 들어오고
아파트가 원래 이렇게 높은 건물이었나, 시선을 오래 두다가
슬슬 한두 명 잠에서 깨어날 때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한 버스가 덜컹거린다
발밑에서 관의 무게가 느껴지자
다음 주까지 제출해야 하는 과제가 불현듯 생각났고
내가 그날 애인과 시간을 좀 더 가졌더라면 지금까지 잘 만날 수 있었을까, 후회가 쌓이던 옥탑이 떠올랐다
더러운 새벽의 산책은 그만하기로, 피곤하다, 주말이나 얼른 와라
오늘을 버티고 내일만 지나면 주말이 오니까
모처럼 혼자 전시회라도 보러 갈까
생각들이 맥락을 잃는 동안
잠에서 깬 이모들, 아이들, 엄마가 차례로 커튼을 젖힌다
화창한 날씨, 오늘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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