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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에는 이미 김이 서려 있어 어디쯤 왔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고 본문

문장들

창밖에는 이미 김이 서려 있어 어디쯤 왔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고

홍제 2023. 10. 30. 22:32

 거리로 나와 우리는 각자의 방향으로 헤어졌다. 겨우 막차에 올랐는데 찬호가 또 전화를 걸어왔다. 받을까 말까 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버스 엔진이 맹렬히 돌아가는 게 발밑에서 느껴졌다.

 "잘 가고 있어?"

 "잘 가고 있는지는 왜 만날 물어?"

 찬호가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보니까 구덩이만 있었던 게 아니라서. 손바닥만한 모니터가 있었어. 세실리아 같더라고."

 "알아, 구덩이를 파고 있었잖아. 세실리아가."

 전화를 끊으려는데 찬호가 아니라고 했다.

 "파고 있지 않았고 덮고 있었는데?"

 "덮고 있었다니?"

 "앉아서 구덩이를 지루하게 덮고 있더라고. 아무튼 난해한 작품이었어. 내년 여름엔 정말 요트 탄다니까 그때 보자."

 전화가 끊겼다. 엉망으로 취한 누군가가 춥다고, 씨발 춥다고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저씨만 추운 거 아니에요, 우리도 다 춥다고요. 기껏 대답해줬더니 만원 버스의 저편에서 누구야? 누가 뭐래는 거야? 내가 춥다는데? 하고 맞받아쳤다. 버스가 가다가 멈추고 가다가 멈추는 사이 몸이 점점 더 녹았다. 여름이 왔나, 여름이 와야지, 그래야 요트를 타러 가지. 버스가 달리자 발밑으로 점점 더 따뜻한 기운이, 뿌리칠 수 없는 누군가의 유혹처럼 끈질기게 올라왔다. 그러나 그렇게 노곤하게 잠이 들었다가도 세실리아, 그 이름만 생각하면 얼음 송곳에 찔린 듯 놀라 깨어나는 것이었다. 창밖에는 이미 김이 서려 있어 어디쯤 왔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고. 

 

 

김금희 「세실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