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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심보선 본문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심보선

홍제 2024. 1. 15. 10:18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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